1대 태조 홍무제 (주원장) — 1368년 즉위
홍무제(洪武帝, 1328~1398, 재위 1368~1398)는 빈농 출신으로 원나라 말 혼란기에 홍건적에 투신하여 세력을 키우고,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한 개국 황제이다. 묘호 태조(太祖).
황제권을 극도로 강화하여 재상직(중서성)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두었다. 또한 초기부터 공신들을 대거 숙청하는 호유용(胡惟庸)의 옥·남옥(藍玉)의 옥 등 대규모 숙청을 단행하여 황권을 확립하였다.
조세 제도를 정비하고 리갑제(里甲制)를 실시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켰다. 해금령(海禁令)을 내려 민간 해외 무역을 금지하였으며, 이는 이후 명나라의 폐쇄적 대외 정책의 기틀이 되었다.
전 황제 중 가장 많은 자녀(24남 16녀)를 두었으며, 각 황자를 전국에 왕으로 봉하는 분봉 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분봉제는 후일 정난의 변(靖難之變)의 씨앗이 된다.
2대 혜종 건문제 (주윤문) — 1398년 즉위
건문제(建文帝, 1377~1402?, 재위 1398~1402)는 태조의 적장손으로 즉위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유학에 밝아 인정(仁政)을 추구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묘호 혜종(惠宗).
즉위 후 황실 내 번왕(藩王)들의 세력을 삭감하는 삭번(削藩)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반발한 숙부 연왕 주체(朱棣)가 1399년 정난의 변을 일으켜 황권에 도전하였다.
3년간의 내전 끝에 1402년 연왕의 군대가 수도 난징(南京)을 함락하였다. 건문제는 궁궐 화재 속에서 행방불명되었으며, 해외로 도주했다는 설이 후대까지 전해졌다. 영락제는 그의 죽음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건문제의 실각 후 그가 시행한 여러 인정 정책은 폐지되었으며, 그를 지지한 대신들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은 명나라 황실 내분의 대표적 사례로 남아 있다.
3대 성조 영락제 (주체) — 1402년 즉위
영락제(永樂帝, 1360~1424, 재위 1402~1424)는 태조의 넷째 아들로 정난의 변을 통해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위를 찬탈하였다. 명나라 최전성기를 연 황제로 평가된다. 묘호 성조(成祖).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자금성(紫禁城)을 건설하였다. 이로써 베이징은 이후 500여 년간 중국의 수도가 되었다.
정화(鄭和)를 남해로 파견하여 1405~1433년에 걸쳐 7차례의 대원정을 실시하였다. 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동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항로를 개척하며 명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영락대전(永樂大典)을 편찬하여 방대한 중국 문헌을 집대성하였다. 또한 몽골 원정을 다섯 차례 직접 지휘하였으며, 안남(베트남)을 일시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4대 인종 홍희제 (주고치) — 1424년 즉위
홍희제(洪熙帝, 1378~1425, 재위 1424~1425)는 영락제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강경한 정책을 완화하는 인정(仁政)을 펼쳤으나 재위 10개월 만에 붕어하였다. 묘호 인종(仁宗).
과중한 군사 원정과 토목 공사로 지친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감면하고 죄수를 사면하였다. 정화의 원정을 중단하고 해금령을 강화하는 내수 중심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유학자 관료들을 중용하고 환관의 권력을 제한하였다.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이후 선덕제와 함께 인선(仁宣)의 치(治)라 불리는 태평성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비만한 체구로 인한 건강 문제로 즉위 10개월 만에 48세로 급서하였다. 아들 선덕제에게 황위를 물려주었으며, 단기 재위였음에도 선정군주로 높이 평가된다.
5대 선종 선덕제 (주첨기) — 1425년 즉위
선덕제(宣德帝, 1398~1435, 재위 1425~1435)는 홍희제의 장남으로, 조부 영락제의 무단 정치와 부친 홍희제의 인정을 균형 있게 계승하여 명나라의 황금기를 완성하였다. 묘호 선종(宣宗).
인선의 치(仁宣之治)의 주역으로, 관료 제도를 정비하고 세금을 합리화하였다. 그림·서예·귀뚜라미 싸움에 조예가 깊어 귀뚜라미 황제(蛐蛐皇帝)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의 권한을 강화하고 환관들에게 문서 처리를 맡기는 사례감(司禮監)을 육성하였다. 이는 후일 환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구조적 틀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안남)을 독립시키고 북방 방어에 집중하는 현실적 외교 노선을 택하였다. 재위 1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였으나 37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승하하였다.
6대 영종 정통제 (주기진(1차)) — 1435년 즉위
정통제(正統帝, 1427~1464, 재위 1435~1449 / 1457~1464)는 선덕제의 장남으로 9세에 즉위하였다.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포로가 된 황제로, 극적인 복위를 경험한 특이한 경력의 군주이다. 묘호 영종(英宗).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환관 왕진(王振)의 권력이 막강해졌다. 1449년 왕진의 권유로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몽골 원정에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에서 오이라트의 에센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였다(토목의 변).
포로 생활 1년 후 귀국하였으나 이미 이복동생 경태제가 황위를 잇고 있어 태상황으로 연금되었다. 1457년 경태제가 병에 걸린 틈에 쿠데타(탈문의 변)를 일으켜 복위에 성공하였다.
복위 후 왕진을 위한 사당을 건립하는 등 옛 총신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재위 말년에는 왕진의 심복 석형(石亨) 등 쿠데타 공신들도 숙청하며 황권을 안정시켰다.
7대 대종 경태제 (주기옥) — 1449년 즉위
경태제(景泰帝, 1428~1457, 재위 1449~1457)는 선덕제의 둘째 아들로, 토목의 변 이후 황태후와 대신들에 의해 옹립된 황제이다. 위기의 명나라를 수습하였으나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묘호 대종(代宗).
병부상서 우겸(于謙)을 기용하여 몽골의 베이징 공격을 격퇴하는 수도 방어에 성공하였다. 포로가 된 형 정통제가 귀국한 뒤에도 황위를 반환하지 않고 연금 상태를 유지하였다.
병으로 쓰러진 사이 형 정통제 측의 탈문의 변으로 황위를 빼앗겼다. 얼마 후 사망하였으며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황위 찬탈자로 처리되었다가, 성화제 때 명예가 일부 회복되었다.
비록 복위된 형에 의해 지워진 황제이지만, 재위 기간 국가적 위기를 수습한 공적이 높이 평가된다. 우겸과 경태제의 협력은 명나라의 붕괴를 막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6대 영종 천순제 (주기진(복위)) — 1457년 즉위
천순제(天順帝, 재위 1457~1464)는 탈문의 변으로 복위한 정통제의 두 번째 재위기이다. 동일 인물인 영종의 두 번째 연호 재위기로, 별도 황제로 계산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복위 직후 우겸을 반역죄로 처형하였다. 이는 명 후기 내내 논란이 된 결정으로, 국가 위기를 구한 충신을 정적으로 몰아 처형한 사례로 비판받는다.
쿠데타 공신 석형 등을 중용하였다가 후에 권력 남용을 이유로 숙청하였다. 재위 후반에는 비교적 안정된 통치를 이어갔으며, 1464년 37세로 붕어하였다.
유일하게 두 개의 연호(정통·천순)를 가진 명나라 황제이다. 포로 생활과 연금, 복위라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나 후기 치세는 무난히 유지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8대 헌종 성화제 (주견심) — 1464년 즉위
성화제(成化帝, 1447~1487, 재위 1464~1487)는 영종의 장남으로 비교적 안정된 치세를 보냈으나, 총비 만귀비(萬貴妃)에 대한 집착과 환관 정치의 심화로 혼정(昏政)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묘호 헌종(憲宗).
만귀비는 황제보다 17세 연상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황후를 제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만귀비는 다른 후궁들의 출산을 방해하였으며, 이 때문에 황제의 아들인 효종(홍치제)은 비밀리에 키워져야 했다.
환관 왕직(汪直)이 이끄는 서창(西廠)을 설치하여 대규모 감시·밀정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명나라 황제들이 환관 기관을 통해 신하들을 통제하는 관행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재위 기간 중 경태제를 복원하는 조치를 취하여 전임 황제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통치 후반에는 환관 세력이 비대해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졌으나 사회는 전반적으로 안정을 유지하였다.
9대 효종 홍치제 (주우탱) — 1487년 즉위
홍치제(弘治帝, 1470~1505, 재위 1487~1505)는 성화제의 셋째 아들로, 명나라에서 가장 현명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유일하게 황후 한 명만을 둔 일부일처 황제로도 유명하다. 묘호 효종(孝宗).
현명한 대신들을 중용하고 환관 세력을 억제하였다. 세금을 줄이고 죄수를 사면하는 인정을 펼쳐 홍치지치(弘治之治)라는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다.
이부상서 마문승(馬文升), 대학사 구준(丘濬) 등 유능한 관료들과 함께 행정을 정비하고 부패를 척결하였다. 경연(經筵)을 자주 열어 학문을 장려하고 간언을 수용하는 군주의 덕목을 갖추었다.
재위 18년 동안 황후 장씨(張氏) 외에 다른 후궁을 들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36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승하하였으며, 짧은 재위였음에도 명군으로 높이 평가된다.
10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 1505년 즉위
정덕제(正德帝, 1491~1521, 재위 1505~1521)는 홍치제의 외아들로 15세에 즉위하였다. 기이한 행동과 놀이를 즐겨 황음무도한 황제의 대표 사례로 거론된다. 묘호 무종(武宗).
환관 유근(劉瑾)을 총애하여 국정을 맡기다시피 하였다. 유근은 4년간 실질적 권력을 쥐고 대신들을 탄압하였으나, 1510년 역모죄로 능지처참되었다.
스스로 무장(武將)을 자처하며 총관진국공(總管鎭國公)이라는 무관직을 만들어 자신에게 부여하고, 직접 군사 원정에 나서기를 즐겼다. 변방 군영에서 생활하거나 동물원을 만들어 야수를 키우는 기행으로 유명하다.
후사 없이 30세로 승하하였다. 직계 후손이 없어 방계 혈족인 세종(가정제)이 뒤를 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예의(禮議) 논쟁이 발생하여 명나라 정치판을 오래 흔들었다.
11대 세종 가정제 (주후총) — 1521년 즉위
가정제(嘉靖帝, 1507~1566, 재위 1521~1566)는 정덕제의 사촌으로, 방계에서 황위를 이었다. 45년간 재위하며 명나라 중기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든 황제이다. 묘호 세종(世宗).
즉위 직후 예의(禮議) 논쟁이 벌어졌다. 가정제는 자신의 생부를 황고(皇考)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이 반대하였고, 황제는 반대 세력을 숙청하며 황권을 관철시켰다.
도교에 심취하여 황궁에서 도교 의식에 몰두하고 불로장생약을 탐닉하였다. 치세 후반에는 정사를 거의 돌보지 않고 서원에서 은거하며 대신 엄숭(嚴嵩)이 20여 년간 국정을 농단하였다.
북방에서는 몽골 알탄 칸의 침입이 잦았고 1550년 알탄 칸이 베이징 인근까지 침략하는 경신의 변이 발생하였다. 남방에서는 왜구(倭寇)가 절강·복건 연안을 약탈하는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 사태가 20여 년간 이어졌다.
12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 1566년 즉위
융경제(隆慶帝, 1537~1572, 재위 1566~1572)는 가정제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의 도교 정치와는 달리 현실 정치에 복귀하였다. 짧은 재위였지만 명나라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묘호 목종(穆宗).
고공(高拱)·장거정(張居正)·진이근(陳以勤) 등 명신들을 중용하여 적폐를 개혁하였다. 가정제 시대에 내린 가혹한 처벌로 희생된 인사들을 복권시켰다.
융경 화의(隆慶和議, 1571)를 통해 몽골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마시(馬市) 무역을 허용하였다. 또한 해금령을 일부 완화하여 민간의 해외 무역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융경 개방).
36세의 나이로 붕어하였으며, 아들 만력제가 뒤를 이었다. 장거정이 이후 만력 초기 개혁의 중심이 되어 명나라 최후의 중흥을 이끌었다.
13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 1572년 즉위
만력제(萬曆帝, 1563~1620, 재위 1572~1620)는 융경제의 셋째 아들로, 명나라에서 가장 긴 48년을 재위하였다. 치세 전반은 장거정의 개혁으로 중흥기였으나, 후반은 황제의 怠政으로 명나라 쇠락의 결정적 원인이 된 황제이다. 묘호 신종(神宗).
재상 장거정(張居正)의 보좌 아래 토지 조사(一條鞭法 확대), 군사 개혁, 재정 건전화를 추진하여 만력중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장거정 사후 그의 가산을 몰수하고 명예를 박탈하였다.
1592~1598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조선에 대규모 원군을 파견하였다. 수십만 명군이 7년간 조선에 주둔하였으며, 이는 명나라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
재위 후반 28년간 조회를 거부하고 신하를 만나지 않는 태정(怠政)을 이어갔다. 이른바 만력 태정기에 국정이 마비되고 동림당(東林黨)과 비동림당의 격렬한 당쟁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의 정치 공백이 명 말기 혼란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된다.
14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 1620년 즉위
태창제(泰昌帝, 1582~1620, 재위 1620)는 만력제의 장남으로, 즉위 1개월 만에 의문사한 비운의 황제이다. 묘호 광종(光宗).
즉위 후 환관 정치를 견제하고 동림당 인사들을 복권시키며 적극적 정치 개혁의 의지를 보였다. 재위 중 전국 각지의 무거운 과세를 폐지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홍환사건(紅丸事件)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병으로 쓰러진 황제에게 신하가 붉은 환약을 진상하였고 복용 후 갑자기 사망하였다. 독살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1개월이라는 극히 짧은 재위로 명나라 황제 중 가장 짧은 재위를 기록하였다. 아들 천계제가 16세에 즉위하였으나 역시 환관 위충현의 전횡 속에 단명하였다.
15대 희종 천계제 (주유교) — 1620년 즉위
천계제(天啓帝, 1605~1627, 재위 1620~1627)는 태창제의 장남으로 16세에 즉위하였다. 목공 일에 열중하여 목수 황제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환관 위충현의 전횡 시대를 연 황제이다. 묘호 희종(熹宗).
황제가 목공 취미에 몰두한 틈을 타 유모 객씨(客氏)와 환관 위충현(魏忠賢)이 황궁을 장악하였다. 위충현은 동창(東廠)과 서창(西廠)을 동원하여 동림당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재위 기간 중 후금(後金, 이후 청)이 급성장하여 요동 대부분을 잃었다. 무장 원숭환(袁崇煥)이 영원성에서 누르하치를 격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대세를 막지는 못하였다.
23세에 후사 없이 붕어하였으며, 아우 숭정제에게 유언으로 위충현을 신임하라고 당부하였으나, 숭정제는 즉위 직후 위충현을 처형하였다.
16대 의종 숭정제 (주유검) — 1627년 즉위
숭정제(崇禎帝, 1611~1644, 재위 1627~1644)는 천계제의 아우로 17세에 즉위하여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된 비운의 군주이다. 근면하고 뛰어난 군주였으나 기울어진 나라를 살리지 못하였다. 묘호 의종(毅宗) 또는 사종(思宗).
즉위 직후 위충현 세력을 일거에 숙청하였다. 중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하루 5~6시간밖에 자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하였으나, 만성적인 재정 부족과 내외 위기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1644년 3월 베이징을 함락하였다. 황제는 신하들이 모두 도망가거나 항복하는 가운데 홀로 경산(景山)의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명나라 276년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당파 싸움과 재정 고갈, 후금의 군사적 압박, 기근과 역병이 겹친 천재지변 속에서 숭정제는 50여 명의 재상을 교체하는 등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자결하면서 유언에 나는 덕이 없어 천하를 잃었다. 적신(賊臣)들에게 속았으나 백성들은 죄가 없으니 능지처참하지 말라고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