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황제 순서

송나라 황제 순서

송나라 황제 순서와 계보

송나라(宋, 960~1279)는 조광윤(趙匡菤)이 오대십국(五代十國)(오대십국)의 혼란을 끝내고 960년 건국한 왕조입니다. 복송(北宋) 167년과 남송(南宋) 152년, 총 319년의 대왕조로, 중국사 엑산 가장 번성한 문화적인 시대 중 하나로 밝혀집니다.

원안석 변법(1069~1076), 정강의 변(1127)으로 상징되는 복송의 움직임, 갰나라에 맞선 악비(岳飛)의 항전과 비극적 죽음, 그리고 1279년 애산전투(崖山之戰)의 깔긔한 마지막까지를 아래 계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대 황제 상세 정보

1대 태조 건륭제 (조광윤) — 960년 즉위

태조(太祖, 927~976, 재위 960~976)는 후주(後周)의 금군 총사령관으로, 진교의 변(陳橋兵變, 960)에서 부하들에 의해 황포를 걸쳐 입고 황제로 추대되어 송나라를 건국한 개국 황제이다. 연호 건륭(建隆)·건덕(乾德)·개보(開寶).

오대십국(五代十國) 약 50년의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남방의 여러 소국들을 차례로 병합하였으나, 북한(北漢)은 태종 때까지 남았다.

군벌 세력을 근본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절도사들을 연회에 초청하여 병권을 자진 반납하게 한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 일화로 유명하다. 이를 통해 문인 관료제를 강화하는 중문경무(重文輕武) 정책의 초석을 닦았다.

976년 밤 동생 조광의(태종)와 단독으로 면담한 뒤 갑자기 붕어하였다. 촉사광성(燭影斧聲,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 미스터리로 전해지며, 독살 의혹이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2대 태종 태평흥국제 (조광의) — 976년 즉위

태종(太宗, 939~997, 재위 976~997)은 태조의 친동생으로, 형의 의문스러운 죽음 이후 황위를 계승한 송나라 제2대 황제이다. 연호 태평흥국(太平興國) 등.

979년 오대십국 마지막 잔존 국가인 북한(北漢)을 멸망시켜 중국 재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979년과 986년 두 차례의 요(거란)나라 원정에서 모두 대패하였다.

특히 979년 고량하 전투(高梁河之戰)에서 직접 화살을 맞은 채 당나귀 수레를 타고 패주하였다는 일화는 송나라 군사력의 한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전해진다.

과거제도를 대폭 확대하여 재위 중 진사과 합격자를 대규모로 발탁하였다. 태조로부터 계승한 중문경무 노선을 심화시켜 무장보다 문관을 우대하는 송나라 특유의 정치 문화를 정착시켰다.

3대 진종 경덕제 (조항) — 997년 즉위

진종(眞宗, 968~1022, 재위 997~1022)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송나라 제3대 황제이다. 치세의 최대 사건은 거란 요나라와 맺은 전연의 맹(澶淵之盟, 1005)이다. 연호 경덕(景德) 등.

1004년 요나라가 대규모로 침공하자 재상 구준(寇準)의 강력한 건의로 진종이 직접 전선에 나서 군심을 안정시켰다. 전연성(澶淵城) 앞에서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전연의 맹을 체결하였다.

전연의 맹 조건: 송은 매년 요에게 은 10만 냥·비단 20만 필을 세폐로 지급하는 대신 요나라는 송을 침공하지 않는다는 평화 협약이다. 굴욕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이후 100여 년간 북방 평화가 지속되어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말년에 도교에 심취하여 천서(天書)를 제작하고 태산에서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하는 등 미신적 행태로 재정을 낭비하였다. 치세 후반의 오점으로 남아 후세의 비판을 받는다.

4대 인종 경력제 (조정) — 1022년 즉위

인종(仁宗, 1010~1063, 재위 1022~1063)은 진종의 여섯 번째 아들로 송나라 역사상 최장인 41년을 재위한 황제이다. 연호 천성(天聖)·명도(明道)·경력(慶曆)·황우(皇祐)·가우(嘉祐) 등.

1043년 범중엄(范仲淹)·구양수(歐陽脩) 등을 기용하여 경력신정(慶曆新政)을 추진하였다. 관리 고과 강화, 음서(蔭敍) 특권 제한, 지방 행정 개혁 등 10가지 개혁안을 제시하였으나 보수 세력의 반발로 1년여 만에 좌절되었다.

구양수·소동파·범중엄·왕안석·사마광 등 송대 최고의 문인과 정치가들이 이 시기에 배출되었다. 송나라 문학과 사상의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인종은 매우 온화하고 검소한 성품으로 유명하였다. 신하의 직언을 잘 받아들이고 형벌을 최소화하였으며, 그의 붕어 소식에 백성들이 길거리에서 통곡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5대 영종 치평제 (조서) — 1063년 즉위

영종(英宗, 1032~1067, 재위 1063~1067)은 인종의 먼 친족 복왕 조윤양(趙允讓)의 아들로, 인종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로 입적되어 황위를 계승한 송나라 제5대 황제이다. 연호 치평(治平).

즉위 직후 생부 복왕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둘러싼 복의(濮議) 논쟁이 4년 내내 이어졌다. 생부를 황고(皇考)로 추존해야 한다는 황제 측과 이를 반대하는 대신들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사마광(司馬光)에게 《자치통감(資治通鑑)》 편찬을 명하였다. 이 방대한 역사서는 이후 19년에 걸쳐 완성되어 중국 역사학의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즉위 직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황태후가 섭정을 맡았다. 재위 4년 만에 붕어하였으며, 아들 신종이 이어 왕안석 변법의 시대를 열었다.

6대 신종 희녕제 (조욱) — 1067년 즉위

신종(神宗, 1048~1085, 재위 1067~1085)은 영종의 장남으로, 재정난과 군사적 허약을 타파하고자 왕안석(王安石)을 기용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한 송나라 제6대 황제이다. 연호 희녕(熙寧)·원풍(元豐).

왕안석 변법(王安石變法, 1069~1076): 청묘법(靑苗法)·균수법(均輸法)·시역법(市易法)·모역법(募役法)·보갑법(保甲法)·보마법(保馬法) 등 재정·군사·행정 전반의 대개혁을 추진하였다.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지지하는 신법당과 사마광을 중심으로 한 구법당(보수파)의 격렬한 당쟁이 발생하였다. 이 당쟁은 이후 북송 멸망까지 이어지는 고질병이 된다.

서하(西夏) 원정을 두 차례 단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특히 1082년 영락성 전투에서 30만 군사를 잃는 참패를 당하였다. 이후 울분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085년 37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7대 철종 원우제 (조후) — 1085년 즉위

철종(哲宗, 1076~1100, 재위 1085~1100)은 신종의 여섯 번째 아들로 9세에 즉위하였다. 연호 원우(元祐)·소성(紹聖)·원부(元符).

즉위 초 고태황태후(高太皇太后)가 섭정하며 사마광을 기용하고 왕안석의 신법을 전면 폐지하였다. 1093년 고태황태후 사망 후 친정을 시작하여 신법을 부활시키고 구법당을 대거 축출하였다.

신법당과 구법당의 번갈아 집권과 상호 숙청이 반복되어 송나라 정치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소동파·범순인 등 구법당 인사들이 남방으로 줄줄이 유배되었다.

24세의 나이에 후사 없이 붕어하였다. 동생 휘종(조길)이 황위를 계승하게 되었는데, 당시 태후가 그림 잘 그리는 황자를 선택한 결정이 북송 멸망의 씨앗이 되었다고 후세에 평가된다.

8대 휘종 정화제 (조길) — 1100년 즉위

휘종(徽宗, 1082~1135, 재위 1100~1125)은 신종의 열한 번째 아들로,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예술가 황제이자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망국의 군주라는 이중의 평가를 받는다. 연호 정화(政和)·선화(宣和) 등.

화조화(花鳥畵)와 독창적인 서체 수금체(瘦金體)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화원(畵院)을 설치하고 방대한 예술품을 수집하였다. 그가 남긴 《선화화보》와 《선화서보》는 중국 미술사의 불후의 보물이다.

여진족의 금(金)나라와 연합하여 요나라를 협공하는 해상의 맹(海上之盟, 1120)을 체결하였다.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금나라에게 송의 군사력 허약이 그대로 드러났고, 금나라가 남하하는 계기가 되었다.

1125년 금나라의 침공으로 아들 흠종에게 양위하였다. 이듬해 정강의 변(靖康之變, 1127)에서 흠종과 함께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만주 오국성(五國城)으로 끌려갔으며, 1135년 54세로 사망하였다.

9대 흠종 정강제 (조환) — 1125년 즉위

흠종(欽宗, 1100~1156, 재위 1125~1127)은 휘종의 장남으로 금나라의 침공 위기 속에 황위를 물려받은 북송의 마지막 황제이다. 연호 정강(靖康).

즉위 직후 금나라의 1차 남하에 이어 2차 침공(1127)으로 수도 개봉(開封)이 함락되었다. 황제·황족·대신·기술자 등 총 3,0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간 정강의 변(靖康之變)이 발생하였다.

부황 휘종과 함께 금나라 오국성(五國城)에 유배되어 소방왕(昭方王)으로 강등되어 비참한 생활을 하였다. 1156년 금나라 땅에서 57세로 사망하였다.

정강의 변은 중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이로써 960년 건국된 북송(北宋)은 167년 만에 막을 내리고, 양자강 남쪽에 남송(南宋)이 새로이 들어서게 된다.

10대 고종 건염제 (조구) — 1127년 즉위

고종(高宗, 1107~1187, 재위 1127~1162)은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로, 정강의 변 당시 포로 신세를 면한 유일한 황자이다. 1127년 남경(현 상추)에서 즉위하여 남송(南宋)을 개창하였다. 연호 건염(建炎)·소흥(紹興).

금나라의 계속된 남하 침공으로 양자강 이남까지 밀려났다가 임안(臨安, 현 항저우)에 수도를 정하였다. 악비(岳飛)·한세충(韓世忠) 등 명장들이 금나라에 맞서 연전연승하였으나, 고종은 북진보다는 화의를 선택하였다.

재상 진회(秦檜)를 기용하여 1141년 소흥화의(紹興和議)를 체결하였다. 매년 금나라에 은 25만 냥·비단 25만 필을 세폐로 바치고 금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기는 굴욕적 조건을 수락하였다. 화의 추진 과정에서 악비가 무고로 처형되었다.

1162년 건강 문제를 이유로 양자 효종에게 황위를 선양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가 1187년 81세로 사망하였다. 남송 최장수 인물이지만 굴욕적 화의와 악비 처형으로 후세의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11대 효종 건도제 (조신) — 1162년 즉위

효종(孝宗, 1127~1194, 재위 1162~1189)은 태조 7세손으로 고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황위를 이은 남송 제2대 황제이다. 남송에서 가장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연호 융흥(隆興)·건도(乾道)·순희(淳熙).

즉위 후 악비의 억울함을 풀어 명예를 회복시키고 굴욕적 화의를 주도한 진회 등을 탄핵하였다. 1163년 융흥북벌(隆興北伐)을 단행하였으나 부하 장수의 독단으로 실패하였다.

이후 융흥화의(1164)로 금나라와 재차 화의를 맺었으나 세폐 부담을 줄이고 군신관계를 숙질(叔侄)관계로 격상시켜 이전보다 훨씬 나은 조건을 얻어냈다.

내정을 정비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남송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189년 아들 광종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으로 물러났으나, 광종이 효도를 다하지 않아 부자 갈등이 심화되었다.

12대 광종 소희제 (조돈) — 1189년 즉위

광종(光宗, 1147~1200, 재위 1189~1194)은 효종의 셋째 아들로 남송 제3대 황제이다. 악처 이황후(李皇后)에게 완전히 지배당한 황제로 유명하다. 연호 소희(紹熙).

이황후는 황제에게 효종을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황제를 심리적으로 조종하였다. 광종은 중병이 든 부친 효종이 임종하는 자리에도 가지 않았다.

태상황 효종의 장례 처리를 둘러싼 갈등으로 1194년 조여우(趙汝愚)·한탁주(韓侂冑) 등 대신들이 태황태후의 동의 아래 광종을 강제로 퇴위시키는 소희내선(紹熙內禪)을 단행하였다.

퇴위 후 정신 이상 증세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200년 54세로 사망하였다. 광종의 치세는 남송 정치 문란의 시작점으로 평가된다.

13대 영종 경원제 (조확) — 1194년 즉위

영종(寧宗, 1168~1224, 재위 1194~1224)은 광종의 둘째 아들로 남송 제4대 황제이다. 재위 30년간 두 권신에게 실권을 빼앗긴 허수아비 황제였다. 연호 경원(慶元)·가태(嘉泰)·개희(開禧)·가정(嘉定).

전반기에는 한탁주(韓侂冑)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탁주는 북벌론을 내세워 1206년 개희북벌(開禧北伐)을 단행하였으나 참패하였고, 금나라와의 협상 조건으로 한탁주의 목이 잘려 금나라에 보내지는 굴욕이 벌어졌다.

이후 사미원(史彌遠)이 20년간 재상 자리를 독점하며 국정을 좌우하였다. 영종 말년에는 사미원이 태자를 교체하는 전횡까지 부렸다.

이 시기 주희(朱熹)의 성리학이 정학(正學)으로 공인되어 이후 동아시아 사상의 주류가 되었다. 남송의 경제적 번영이 이어졌으나 정치적으로는 암울한 시기였다.

14대 이종 보경제 (조윤) — 1224년 즉위

이종(理宗, 1205~1264, 재위 1224~1264)은 태조 10세손으로 영종의 먼 친족이다. 권신 사미원이 기존 태자를 폐하고 옹립한 남송 제5대 황제이다. 연호 보경(寶慶)·소정(紹定)·단평(端平)·가희(嘉熙)·순우(淳祐)·보우(寶祐)·개경(開慶)·경정(景定).

즉위 초 10년간은 사미원의 섭정 아래 있었다. 사미원 사후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치세 후반에는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불교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몽골과 연합하여 1234년 금나라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蒙宋聯合). 그러나 금나라 멸망 이후 몽골이 직접적인 위협이 되어 양양성(襄陽城) 등에서 치열한 대몽 항전이 시작되었다.

성리학(性理學)을 국가의 공식 이념으로 확립하여 이후 동아시아 사상의 근간이 되게 하였다. 이종이라는 묘호 자체가 성리학의 이(理)를 나라의 근본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15대 도종 함순제 (조기) — 1264년 즉위

도종(度宗, 1240~1274, 재위 1264~1274)은 이종의 조카로 남송 제6대 황제이다. 재위 내내 권신 가사도(賈似道)의 전횡 아래 국정이 마비된 상태였다. 연호 함순(咸淳).

가사도는 군사 실패와 부패를 감추고 황제를 기만하였다. 원나라(몽골)가 양양성을 포위(1267~1273)하는 동안 가사도의 눈속임으로 적절한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273년 양양성이 함락되자 원나라의 남하가 본격화되었다. 도종은 현실을 외면한 채 주연을 즐기다 1274년 34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도종의 세 아들 공종·단종·위왕이 잇따라 황제로 옹립되어 원나라에 맞서 마지막 항전을 펼쳤으나 모두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였다.

16대 공종 덕우제 (조현) — 1274년 즉위

공종(恭宗, 1271~1323, 재위 1274~1276)은 도종의 아들로 4세에 즉위하였다. 태황태후 사씨(謝氏)가 섭정을 맡았으나 원나라의 압도적 침공에 속수무책이었다. 연호 덕우(德祐).

1276년 원나라 군대가 임안에 임박하자 태황태후는 항복 문서를 발송하였다. 공종은 원나라로 압송되어 영국공(瀛國公)으로 강등되었다.

원나라에서 성장한 후 티베트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1323년 원 인종이 그의 한시가 반원적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공종의 항복 후에도 남송 충신들이 두 황자를 모시고 저항을 계속하여, 남송은 1279년 애산전투까지 3년간 더 버텼다.

17대 단종 경염제 (조시) — 1276년 즉위

단종(端宗, 1268~1278, 재위 1276~1278)은 도종의 장남으로, 공종이 원나라에 항복한 후 충신들에 의해 옹립된 남송 제8대 황제이다. 연호 경염(景炎).

육수부(陸秀夫)·장세걸(張世傑)·문천상(文天祥) 등 충신들이 단종을 모시고 해상에서 원나라에 맞서 계속 저항하였다. 복주·광주 등 각지를 전전하며 항전을 이어갔다.

문천상(文天祥)은 육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 1278년 체포되어 쿠빌라이의 회유를 거절하고 1282년 처형되었다. 그의 절의시 《정기가(正氣歌)》는 후세에 전해지는 불후의 명작이다.

1278년 단종이 선박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8대 위왕 상흥제 (조병) — 1278년 즉위

위왕(衛王, 1272~1279, 재위 1278~1279)은 도종의 막내아들로 남송의 마지막 황제이다. 7세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연호 상흥(祥興).

육수부와 장세걸이 마지막 수만 병력과 함께 광동 해안 애산(崖山)에서 원나라 수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애산전투, 崖山之戰, 1279).

1279년 2월 원나라 수군에 완전히 포위되어 승산이 없어지자,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함께 순절하였다. 뒤이어 수십만 명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애산전투의 패배로 남송은 공식적으로 멸망하였다. 960년 건국된 송나라는 북송 167년·남송 152년, 총 319년의 역사를 마감하였다. "애산 이후 더 이상 중국은 없다(崖山之後無中國)"는 말이 후세에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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