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황제 순서

청나라 황제 순서

청나라 황제 순서와 계보

청나라는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 것에서 시작하여, 1636년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1644년 명나라 멸망 후 중국 전역을 지배하게 됩니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쇠퇴하여 1912년 선통제(푸이)를 마지막으로 멸망하였습니다.

역대 황제 상세 정보

1대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 — 1616년 즉위

천명제(天命帝, 1559년 ~ 1626년)는 여진족 출신으로 분산된 여진 부족들을 무력으로 통일하고,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며 스스로 칸(汗)으로 선포한 청나라의 실질적 창업자이다.

1601년 팔기제(八旗制)를 창설하여 만주족의 군사·행정·생산 기능을 하나로 묶은 독창적인 군사 제도를 완성했다. 팔기제는 이후 청나라 지배 체제의 근간이 되었다.

1599년 만주 문자(만문滿文)를 제정하여 민족 고유의 문자를 갖게 하였으며, 사르후 전투(1619년)에서 명나라 원정군을 대파하며 요동 지역의 패권을 확립했다.

1626년 명나라의 영원성(寧遠城) 공략 중 홍이포(홍이 대포)에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사후 그의 업적은 아들 홍 타이지에 의해 완성된다.

2대 태종 숭덕제 (홍 타이지) — 1626년 즉위

숭덕제(崇德帝, 1592년 ~ 1643년)는 후금의 제2대 군주로, 1636년 국호를 후금에서 청(淸)으로, 민족명을 여진에서 만주(滿洲)로 바꾸며 청나라를 공식 건국한 군주이다.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굴복시키고 군신관계를 맺었다.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다.

내몽골 차하르를 정복하고 원나라의 옥새를 손에 넣어 몽골의 대칸 칭호도 계승하였다. 이를 통해 만·한·몽 삼족의 지배자로 권위를 높였다.

문관 제도를 정비하고 한족 관료를 대거 등용하는 한화(漢化) 정책을 추진하여 이후 청나라가 중원을 통치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1643년 심양에서 급서하여 중원 입성을 끝내 보지 못했다.

3대 세조 순치제 (푸린) — 1643년 즉위

순치제(順治帝, 1638년 ~ 1661년, 재위: 1643년 ~ 1661년)는 청나라의 제3대 군주로, 6세에 즉위하여 숙부 도르곤(多爾袞)의 섭정을 받았다. 1644년 명나라 멸망 후 베이징에 입성하여 청나라 최초로 중원을 통치한 황제이다.

도르곤의 지휘 하에 이자성의 난으로 수도를 잃은 명나라 잔존 세력(남명)을 토벌하고 중국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도르곤 사후 14세에 친정을 선포하며 직접 통치에 나섰다.

변발령(辮髮令)을 강제하여 한족에게 만주족 풍습을 따르도록 하였으나, 동시에 유교적 통치 질서를 존중하고 한족 관료를 적극 활용하는 회유책도 병행하였다.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선승 옥림통수(玉林通琇)에게 귀의했으며, 총애하던 후궁 동악비(董鄂妃)의 죽음 이후 크게 상심하여 재위 18년 만에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4대 성조 강희제 (효완예이) — 1661년 즉위

강희제(康熙帝, 1654년 ~ 1722년, 재위: 1661년 ~ 1722년)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재위(61년)를 기록한 황제로, 청나라의 전성기를 연 군주이다. 8세에 즉위하여 14세에 보정대신 오보이(鰲拜)를 친히 제거하고 친정을 시작했다.

1673년 오삼계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三藩之亂)을 8년에 걸쳐 평정하고, 1683년 대만의 정씨 정권을 정복하여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완성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여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 중국 최초의 근대적 국경 조약을 맺었다. 1696년 준가르의 갈단을 격파하고 외몽골을 복속시키는 등 북방 국경을 안정시켰다.

강희자전(康熙字典) 편찬, 수학·천문학 연구 장려, 서양 선교사(예수회)를 궁정에 초빙하는 등 학문을 적극 장려하였다. 또한 세금 동결 정책으로 민생을 안정시켜 청나라 최전성기의 기틀을 놓았다.

5대 세종 옹정제 (인전) — 1722년 즉위

옹정제(雍正帝, 1678년 ~ 1735년, 재위: 1722년 ~ 1735년)는 청나라의 제5대 황제로,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다. 황위 계승 분쟁을 극복하고 즉위하여 13년간의 짧은 재위 동안 강력한 개혁을 단행한 황제이다.

가장 큰 업적은 세금 제도 개혁으로, 기존의 인두세(정세丁稅)를 토지세에 합산하는 지정은제(地丁銀制)를 시행하여 빈민층의 세금 부담을 대폭 줄이고 과세를 공평하게 했다.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하여 황제가 군사·정치 기밀을 직접 처리하는 체제를 완성하였고, 황위 계승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태자를 비밀리에 지정하는 밀건제(密建制)를 도입하였다.

부패한 관리를 엄하게 처벌하고 문서 행정을 강화하였다. 부지런함으로 유명하여 매일 수백 건의 상주문에 친필 주석을 달았다고 전해지며, 과로가 원인이 되어 재위 13년 만에 붕어하였다.

6대 고종 건륭제 (훙리) — 1735년 즉위

건륭제(乾隆帝, 1711년 ~ 1799년, 재위: 1735년 ~ 1796년)는 청나라의 제6대 황제로, 실제 청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의 정점에 군림한 군주이다. 재위 기간은 강희제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긴 61년이다.

신강(新疆)을 정복하여 청나라의 영토를 역사적 최대 규모로 확장하였다. 또한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고 버마·베트남 원정을 지휘하는 등 열 번의 군사 원정을 통해 스스로를 십전무공(十全武功)의 황제라 칭하였다.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하여 중국의 방대한 전통 문헌을 집대성하였다. 그러나 편찬 과정에서 반청(反淸) 성격의 서적 수천 권을 금서로 지정하고 소각하는 문자옥(文字獄)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치세 후반 총신 화신(和珅)의 전횡을 방치하여 청나라 부패의 씨앗을 심었다. 1793년 영국 매카트니 사절단의 통상 요구를 거절하며 서구와의 근대적 관계 수립 기회를 놓쳤다. 부친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기지 않겠다며 1796년 선위(禪位)하였다.

7대 인종 가경제 (용얀) — 1796년 즉위

가경제(嘉慶帝, 1760년 ~ 1820년, 재위: 1796년 ~ 1820년)는 청나라의 제7대 황제이다. 즉위 초에는 건륭제가 태상황으로 실권을 유지하였고, 건륭제 사후인 1799년 친정을 시작하였다.

친정 첫 조치로 건륭제의 총신이자 역대 최대 탐관오리로 꼽히는 화신(和珅)을 체포하고 자결을 명하였다. 화신의 재산을 몰수하니 국가 재정 수년 치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내부에서는 백련교(白蓮敎)의 난(1796~1804)이 화북 일대를 휩쓸었고, 천리교(天理敎) 반란군이 자금성에 침입하는 사태(1813)도 발생하는 등 내우가 끊이지 않았다.

서구 열강의 통상 압력에는 기존의 쇄국 정책을 유지하였다. 1816년 영국 애머스트 사절단을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문제로 접견도 거부하며 돌려보냈다. 청나라 쇠락의 징조가 본격화된 시기이다.

8대 선종 도광제 (민닝) — 1820년 즉위

도광제(道光帝, 1782년 ~ 1850년, 재위: 1820년 ~ 1850년)는 청나라의 제8대 황제로, 청나라 쇠퇴를 상징하는 황제이다. 절약을 몸소 실천하며 내정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재위 기간 중 가장 중대한 사건은 제1차 아편전쟁(1840~1842)이다. 임칙서(林則徐)를 보내 아편을 몰수·소각하도록 명하였으나, 이를 빌미로 침공한 영국 해군에 패배하였다.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을 체결하여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상하이·광저우 등 5개 항구를 개항하였다. 이는 청나라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이후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아편전쟁 패배의 책임자 임칙서를 신강으로 귀양 보내는 등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태평천국운동의 씨앗이 되는 홍수전의 활동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9대 문종 함풍제 (이주) — 1850년 즉위

함풍제(咸豊帝, 1831년 ~ 1861년, 재위: 1850년 ~ 1861년)는 청나라의 제9대 황제로, 내외의 위기가 동시에 폭발한 격동기의 군주이다.

즉위 직후부터 태평천국운동(1850~1864)이 폭발하여 남중국 전역이 전란에 휩싸였다. 태평천국은 난징을 수도(천경)로 삼고 10여 년간 청나라와 대결하였다.

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애로호 사건)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패배하여 베이징이 점령되었다. 연합군은 황실 정원인 원명원(圓明園)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영국·프랑스군을 피해 열하(熱河, 청더)로 피난하였으며, 1860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구룡반도 일부를 영국에 할양하고 러시아에는 연해주를 넘겨주었다. 1861년 열하에서 붕어하였다.

10대 목종 동치제 (자이슌) — 1861년 즉위

동치제(同治帝, 1856년 ~ 1875년, 재위: 1861년 ~ 1875년)는 청나라의 제10대 황제로, 6세에 즉위하여 생모 서태후(西太后)와 동태후(東太后)의 수렴청정 하에 놓였다.

수렴청정 기간 중 공친왕 혁흔(奕訢)을 중심으로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로, 강남제조총국·복주선정국 등 근대 공장이 설립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을 진압(1864)하고 섬감 회족 반란(1862~1873)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증국번·이홍장·좌종당 등 한족 출신 명신들이 크게 성장하였다. 이 시기를 동치중흥(同治中興)이라 부른다.

17세에 친정을 선포하였으나 서태후의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1875년 19세의 나이에 천연두(혹은 매독)로 급사하여 후사가 없었고, 서태후가 조카 광서제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11대 덕종 광서제 (자이탼) — 1875년 즉위

광서제(光緖帝, 1871년 ~ 1908년, 재위: 1875년 ~ 1908년)는 청나라의 제11대 황제로, 서태후에 의해 선택된 군주이다. 실권은 서태후가 쥐고 있었으나, 광서제는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1894~1895년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에 패배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이는 청나라의 국제적 위신에 치명타를 입혔다.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 등 변법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103일간의 대개혁인 무술변법(戊戌變法)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개혁은 좌절되고 광서제는 이후 10년간 사실상 유폐되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발발하고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서태후와 함께 시안으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귀환하였다. 1908년 서태후보다 하루 앞서 갑작스럽게 붕어하였는데, 비소 중독에 의한 독살 의혹이 제기된다.

12대 공종 선통제 (푸이) — 1908년 즉위

선통제(宣統帝, 1906년 ~ 1967년, 재위: 1908년 ~ 1912년)는 청나라의 제12대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3세에 즉위하여 부친 순친왕 재풍(載灃)이 섭정을 맡았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하여 중화민국이 선포되자, 1912년 2월 만 5세의 나이로 퇴위 조서를 반포하며 2,000여 년간 이어진 중국 황제 제도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퇴위 후에도 자금성에 거주하다 1924년 군벌 펑위샹(馮玉祥)에 의해 강제로 궁에서 쫓겨났다. 이후 일본의 후원을 받아 1932년 일본 괴뢰 국가인 만주국(滿洲國)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가 1950년 중국으로 송환, 전범으로 수용소에서 사상 개조를 받았다. 1959년 특사를 받아 일반 시민으로 석방되어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로 일했다.

1964년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을 출간하였으며, 1987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의 주인공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67년 문화대혁명 중 신장암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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