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황제 순서

당나라 황제 순서

당나라 황제 순서와 계보

당나라(唐, 618~907)는 수나라 말기 혼란기에 이연(李淨)이 세운 왕조로, 수나라의 중앙집권적 코드를 계승되 관료제 정비와 과거제를 대폭 확대함으로써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2대 황제 태종(이세민)의 정관의 치(626~649)와 6대 후반의 개원의 치(712~756) 시절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로 읽히며, 수도 장안(長安)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번성하는 도시였습니다.

당나라는 이새민(李世민, 태종)의 정관의 치로 대표되는 황금기를 묻론,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의 등장, 이백·두보를 마론한 상개의 황금기, 그리고 안사의 난(755~763)과 하강을 공다양하게 담안 289년의 방대한 역사를 지녔습니다. 아래 계보도에서 각 황제를 클릭하면 업적과 주요 사건 등 상세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잠글메모: 로우가 군볼색(香臑色) 카드는 주(武周) 나라의 측천무후를 나타냅니다. 당나라의 황제가 아닌 돉립된 여황제로서, 계보상에는 형식적으로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대 황제 상세 정보

1대 고조 무덕제 (이연) — 618년 즉위

고조(高祖, 566~626, 재위 618~626)는 수나라 말기의 귀족 군벌로, 617년 거병하여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618년 당나라를 건국한 개국 황제이다. 묘호 고조(高祖), 시호 태무황제(太武皇帝).

장강 유역의 이씨 귀족 출신으로 수나라 양제(煬帝)의 사촌이었다. 수나라 말기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차남 이세민의 강력한 권유를 받아 617년 태원(太原)에서 거병하였다. 불과 수개월 만에 장안을 점령하고, 이듬해 양제가 암살되자 당나라를 건국하였다.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수립하고, 균전제(均田制)·조용조(租庸調)를 재정비하여 당나라 기본 제도의 틀을 만들었다. 율령(律令)을 정비하고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626년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이 발생하였다. 차남 이세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형 이건성(李建成)과 동생 이원길(李元吉)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고조는 어쩔 수 없이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황위를 넘겨주었다.

2대 태종 정관제 (이세민) — 626년 즉위

태종(太宗, 598~649, 재위 626~649)은 당나라의 제2대 황제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재위 연호 정관(貞觀), 이 시기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부른다. 묘호 태종(太宗).

현무문의 변으로 권력을 잡은 후 위징(魏徵) 등 현명한 신하들의 직언을 적극 수용하는 열린 정치를 펼쳤다. 세금을 줄이고 농업을 장려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으며, 문벌이 아닌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돌궐(東突厥)을 632년에 정복하여 텡그리 카간(天可汗, 천가한) 칭호를 받으며 초원 유목민들의 지도자로도 인정받았다. 서역(실크로드)을 장악하여 동서 교역의 황금기를 열었다.

644~645년 고구려 원정을 직접 지휘하였으나 안시성(安市城) 전투에서 패퇴하였다. 이후에도 세 차례 더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649년 붕어하였다. 고구려 원정은 당나라의 대표적인 군사적 좌절로 역사에 기록된다.

3대 고종 영휘제 (이치) — 649년 즉위

고종(高宗, 628~683, 재위 649~683)은 태종의 아홉 번째 아들로, 형제들이 세상을 떠나거나 폐위되면서 황위를 계승하였다. 재위 초기에는 치세를 이어갔으나, 말년에는 황후 무측천(武則天)에게 실권을 넘기게 된다. 묘호 고종(高宗).

즉위 후 태종의 후궁이었던 무재인(武才人, 훗날의 측천무후)을 황후로 삼아 기존의 왕황후(王皇后)를 폐위하였다. 이는 당나라 정치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군사적으로는 660년 나당연합군을 파견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는 고구려까지 멸망시켜 삼국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당나라의 영토가 최대로 팽창한 시기이다.

말년에 뇌졸중 등 건강 악화로 국정을 황후 무측천에게 위임하였다. 무측천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점차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683년 고종이 붕어한 후 당나라 황실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4대 중종 신룡제 (이현) — 683년 즉위

중종(中宗, 656~710, 재위 683~684 / 705~710)은 당나라의 제4대 황제로, 측천무후에 의해 두 번 폐위와 복위를 반복한 비운의 황제이다. 묘호 중종(中宗).

첫 번째 재위(683~684)는 불과 55일에 불과하였다. 즉위하자마자 황후의 아버지 위현정(韋玄貞)을 재상에 임명하려다 모후 측천무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폐위되어 방주(房州)로 귀양을 갔다.

14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705년 장간지(張柬之) 등이 신룡의 변(神龍之變)을 일으켜 측천무후를 퇴위시킨 뒤 복위하였다. 두 번째 재위기(705~710)에는 황후 위씨(韋氏)가 측천무후처럼 권력을 장악하였다.

710년 중종은 위황후와 그 딸 안락공주(安樂公主)가 올린 독이 든 떡을 먹고 갑자기 사망하였다. 황후 위씨가 독살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나 가정 내 질병으로 사망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의 사후 태평공주와 예종 이단의 쿠데타로 위씨 일파는 멸족되었다.

5대 예종 경운제 (이단) — 684년 즉위

예종(睿宗, 662~716, 재위 684~690 / 710~712)은 고종과 측천무후의 여덟 번째 아들이자 당나라의 제5대 황제이다. 두 차례 황위를 경험하였으나 두 번 모두 실권이 없었다. 묘호 예종(睿宗).

첫 번째 재위(684~690)는 모후 측천무후가 세운 허수아비 황제였다. 6년간 황제 자리에 있었으나 실질적인 권한은 전혀 없었으며, 690년 측천무후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태자 자리로 강등되었다.

두 번째 재위(710~712)는 위씨 일파를 제거한 정변 이후에 황위를 계승한 것이다. 712년 차남 현종(李隆基)이 태평공주(太平公主) 세력을 제압하는 정변을 일으키자, 예종은 현종에게 황위를 선양하였다.

당나라 황실에서 드물게 두 번 황위에 오른 황제로 기록된다. 재위 기간은 합계 약 8년이지만 실질적으로 친정을 한 기간은 짧았다. 716년 54세로 사망하였다.

6대 현종 개원제 (이융기) — 712년 즉위

현종(玄宗, 685~762, 재위 712~756)은 당나라의 제6대 황제로, 치세 전반은 개원의 치(開元之治)로 당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후반에는 양귀비와의 사랑과 안록산의 난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은 황제이다. 묘호 현종(玄宗).

재위 초기에 야율(姚崇)·송경(宋璟) 등 유능한 재상을 등용하고 균전제를 강화하며 세금을 정비하는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이루었다. 이 시기 당나라는 인구·경제·문화 모든 면에서 절정에 달하였으며, 수도 장안(長安)은 세계 최대의 도시로 번영하였다.

시인 이백(李白)·두보(杜甫)·왕유(王維), 화가 오도자(吳道子) 등 수많은 문화 예술인이 활동한 시기이다. 현종 자신도 음악과 시에 조예가 깊어 이화원(梨花院, 공연 예술 학교)을 설립하였다.

재위 후반 현종은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하며 국정을 소홀히 하였다. 재상 이임보(李林甫)에 이어 양귀비의 사촌 오빠 양국충(楊國忠)이 권력을 전횡하였다. 755년 안록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이 반란을 일으키자(안사의 난) 현종은 쓰촨으로 피란하였으며, 마외역(馬嵬驛)에서 황실 호위군이 양국충과 양귀비를 처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7대 숙종 지덕제 (이형) — 756년 즉위

숙종(肅宗, 711~762, 재위 756~762)은 현종의 셋째 아들로, 안사의 난 도중 현종과 별도로 영무(靈武)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위구르(回紇) 등의 외부 지원을 받아 수도 회복에 힘쓴 황제이다. 묘호 숙종(肅宗).

위구르(回紇) 칸과 연합하여 757년 장안과 낙양(洛陽)을 수복하였다. 단, 위구르군의 약탈을 허락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 이후 위구르의 영향력이 당나라 내정에 깊이 개입하게 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환관(宦官) 이보국(李輔國)이 황후와 결탁하여 국정을 좌우하였다. 말년에는 환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어 이후 당나라 황제들이 환관의 통제를 받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762년 안사의 난이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황후와 환관의 갈등 속에 급작스럽게 붕어하였다. 아들 대종이 뒤를 이어 763년 안사의 난을 최종 진압하였다.

8대 대종 보응제 (이예) — 762년 즉위

대종(代宗, 726~779, 재위 762~779)은 숙종의 장남으로, 763년 안사의 난을 최종 진압하여 내란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번진(藩鎭) 체제를 강화하는 부작용을 남겼다. 묘호 대종(代宗).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반란군 장수들을 회유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반란군 수장의 항복을 받은 뒤 그들을 지방 절도사(節度使)로 임명하여 해당 지역을 독자적으로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번진 할거(藩鎭割據)라는 당나라 말기의 고질적 문제가 되었다.

763년 토번(吐蕃)이 수도 장안을 점령하는 최대의 굴욕을 당하였다. 토번군은 15일간 장안을 장악하였으나, 대종은 곧 수복에 성공하였다.

환관 어조은(魚朝恩)이 군사·정치권을 장악하였으나, 대종은 그를 처형하고 환관 세력을 제어하고자 하였다. 불교에 귀의하여 사찰 건설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기도 하였다.

9대 덕종 건중제 (이괄) — 779년 즉위

덕종(德宗, 742~805, 재위 779~805)은 대종의 장남으로, 번진 할거 문제를 해결하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타협하게 된 황제이다. 묘호 덕종(德宗).

즉위 직후 번진 절도사들의 세력을 삭감하려 시도하였다. 이에 반발한 번진들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783년), 황제는 봉천(奉天)으로 피난하는 굴욕을 당하였다. 결국 번진들을 다시 회유하며 번진 체제를 사실상 인정하게 되었다.

양세법(兩稅法)을 도입하여 조용조(租庸調) 체제를 대체하는 세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토지 소유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양세법은 실질적인 세수 증대에 기여하였으며, 이후 중국 세제의 근간이 되었다.

번진 문제의 좌절 이후 황제는 신하들을 불신하고 환관과 측근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특히 환관 세력이 군사 지휘권까지 장악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으며, 이는 이후 황제들이 환관에게 시해되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10대 순종 영정제 (이송) — 805년 즉위

순종(順宗, 761~806, 재위 805)은 덕종의 장남으로, 재위 8개월 만에 환관 세력에 의해 퇴위된 황제이다. 재위 기간 중 왕숙문(王叔文)·유종원(柳宗元) 등 혁신 관료들과 함께 대담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묘호 순종(順宗).

즉위 전부터 중풍(中風) 증세가 있어 건강이 좋지 않았다. 즉위 후 왕숙문·왕비(王伾) 등 혁신파가 중심이 된 영정혁신(永貞革新)이 추진되었다. 환관의 군권 장악 폐단 시정, 가혹한 세금 폐지, 번진 통제 강화 등의 개혁 조치가 단행되었다.

환관 세력의 강력한 반발로 혁신은 불과 수개월 만에 좌절되었다. 환관 구문진(俱文珍) 등이 반격하여 왕숙문을 비롯한 혁신파 인사들을 쫓아냈고(이왕팔사마 사건), 순종은 병을 이유로 강제 양위하였다.

아들 헌종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가 이듬해 사망하였다. 영정혁신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당나라 관료제 개혁의 선구적 시도로 역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11대 헌종 원화제 (이순) — 805년 즉위

헌종(憲宗, 778~820, 재위 805~820)은 순종의 장남으로, 번진 절도사들을 잇따라 평정하며 당나라의 권위를 회복시킨 황제이다. 이 시기를 원화중흥(元和中興)이라 부른다. 묘호 헌종(憲宗).

재위 기간 중 회서(淮西)·성덕(成德)·평로(平盧)·유주(幽州) 등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행동하던 번진들을 차례로 제압하여 중앙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특히 815년 회서 번진을 정복한 것은 당나라의 위신을 크게 드높인 사건이었다.

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 등 문인이 활약하고 율시(律詩)가 발달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번성한 시기였다. 한유는 불교의 지나친 팽창을 비판하는 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를 올려 유배형을 받기도 하였다.

820년 불로불사를 믿고 금단(金丹) 복용에 빠진 헌종은 환관 진홍지(陳弘志)에게 독살되었다. 번진 재통일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환관 세력에 의해 암살된 비운의 황제로 기록된다.

12대 목종 장경제 (이항) — 820년 즉위

목종(穆宗, 795~824, 재위 820~824)은 헌종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가지 못하고 번진 통제를 다시 포기한 황제이다. 방탕한 생활과 건강 악화로 불과 4년의 짧은 재위를 마쳤다. 묘호 목종(穆宗).

즉위 직후 헌종이 힘겹게 제압한 성덕·평로·유주 번진들이 다시 독립 노선을 취하였다. 목종은 이를 제압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으며, 번진의 자치권을 사실상 인정하는 방향으로 퇴보하였다.

폴로(마구馬球) 경기에 열중하여 국정을 소홀히 하고 향락에 빠졌다. 823년 폴로 경기 중 낙마하여 중병을 얻었으며, 이로 인해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이듬해 30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

세 아들(경종·문종·무종)이 모두 황제가 되는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들의 재위 기간 대부분은 환관 세력과의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16대 선종 대중제 (이침) — 846년 즉위

선종(宣宗, 810~859, 재위 846~859)은 헌종의 열세 번째 아들로, 무종의 숙부이다. 당나라의 마지막 명군으로 평가받으며, 재위 연호 대중(大中)에 따라 대중지치(大中之治)라 불린다. 묘호 선종(宣宗).

즉위 전 황실에서 지능이 낮은 척 살아남은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황형들이 자신을 세력 위협 대상으로 여기지 않도록 광인처럼 행동하였다고 전해진다. 즉위 후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정무에 매진하였다.

전임 무종의 회창멸불 정책을 뒤집어 불교를 부흥시켰다. 부패한 관리들을 엄벌하고, 관직 매매와 음서(蔭敍)를 금지하였으며, 환관의 정치 개입을 억제하는 등 쇠락하던 당나라를 다시 안정시켰다.

재위 13년은 오대 이전 당나라의 마지막 안정기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당나라의 구조적 문제인 번진 할거와 환관 세력의 근본적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859년 불로장생약 복용의 부작용으로 50세에 붕어하였다.

13대 경종 보력제 (이담) — 824년 즉위

경종(敬宗, 810~826, 재위 824~826)은 목종의 장남으로 16세에 즉위하였다. 폴로와 사냥에 빠져 국정을 방치하다가 불과 2년 만에 환관에게 암살된 황제이다. 묘호 경종(敬宗).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국정 전반을 환관들이 좌우하였다. 황제 자신은 야간 폴로 경기를 즐기고 환관들과 어울려 야음을 밝히며 놀았으며,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826년 환관 유극명(劉克明)이 황제가 취해 잠든 사이에 살해하였다. 유극명은 다른 환관들에 의해 곧 처형되었고, 목종의 다른 아들인 문종이 즉위하였다.

재위 2년간의 치세는 사실상 환관 정치의 전형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경종의 죽음은 당나라 황제들이 환관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다.

14대 문종 태화제 (이앙) — 826년 즉위

문종(文宗, 809~840, 재위 826~840)은 목종의 둘째 아들로, 환관 전횡의 폐단을 타파하려다 오히려 더 큰 통제를 받게 된 황제이다. 천자(天子)는 환관의 허수아비라 탄식하였다고 전해진다. 묘호 문종(文宗).

835년 이훈(李訓)·정주(鄭注)와 함께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는 감로지변(甘露之變)을 일으켰다. 환관들을 궁정 마당으로 유인하여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환관들이 신하들을 학살하는 참사로 끝났다.

감로지변 실패 이후 환관들의 황제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환관들은 황제의 측근까지 감시하고, 황제가 신하를 독대하는 것조차 방해하였다. 문종은 사실상 유폐 상태에서 술로 세월을 보내다 840년 붕어하였다.

문학을 사랑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들과 시를 논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무력화되어 약한 황제(懦帝)라는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받기도 한다.

15대 무종 회창제 (이염) — 840년 즉위

무종(武宗, 810~846, 재위 840~846)은 목종의 다섯 번째 아들로, 단호한 성격과 강력한 의지로 환관을 어느 정도 억제하고 대외적으로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가혹한 불교 탄압으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묘호 무종(武宗).

840년부터 845년까지 회창멸불(會昌滅佛)을 단행하여 전국의 사찰 4,600여 개를 헐고 승려 26만여 명을 환속시켰다. 불교의 지나친 세력과 사원의 토지 및 재산 독점이 국가 경제에 해가 된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이 조치로 국가 재정이 일시적으로 개선되었다.

대외적으로 843년 위구르 카간국이 키르기스에 멸망한 틈을 타 독립적으로 행동하던 위구르 세력을 정리하고, 번진 소의(昭義)의 반란도 진압하였다. 당나라의 마지막 번성기라 할 수 있다.

도교에 심취하여 불로장생 약을 복용하였으며, 이로 인한 건강 악화로 846년 36세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후사가 없어 삼촌뻘인 선종 이침(헌종의 아들)이 즉위하게 되었다.

17대 의종 함통제 (이최) — 859년 즉위

의종(懿宗, 833~873, 재위 859~873)은 선종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방탕하고 무능한 황제였다. 의종의 치세부터 당나라의 쇠퇴가 본격화되었다. 묘호 의종(懿宗).

불교와 음악에 탐닉하여 국정을 소홀히 하였다. 항상 대규모 불교 행사를 개최하고 음악 연주를 즐겼으며, 공주가 사망했을 때에는 막대한 장례 비용을 쏟아 민심을 잃었다.

재위 기간 중 많은 번진이 독립적으로 행동하였으며, 남쪽에서는 방훈(龐勛)의 난 등 잇따른 민란이 발생하였다.

873년 불교 사찰에서 부처의 뼈를 모셔오는 대규모 의식(영불골, 迎佛骨)을 거행하였다. 당나라 최후의 성대한 불교 행사로 기록되며, 행사 직후 의종은 40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붕어하였다.

18대 희종 건부제 (이현) — 873년 즉위

희종(僖宗, 862~888, 재위 873~888)은 의종의 다섯 번째 아들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재위 중 황소의 난(875~884)이 발발하여 당나라는 사실상 붕괴 국면에 들어섰다. 묘호 희종(僖宗).

즉위 초부터 환관 전령자(田令孜)가 실권을 장악하였다. 사탕수수 장수 출신 황소(黃巢)가 이끄는 대규모 농민반란군이 880년 장안을 점령하자, 희종은 쓰촨으로 피난하였다. 황소는 대제(大齊) 건국을 선포하였다.

884년 당나라 군벌과 사타족(沙陀族) 이극용(李克用)의 연합군이 황소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극용·주전충(朱全忠) 등 강력한 군벌이 성장하여 황실은 이들의 통제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피란 중에도 폴로를 즐기며 민심을 외면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에도 각지의 번진들이 사실상 독립 상태였으며, 황실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888년 27세로 붕어하였다.

19대 소종 경복제 (이엽) — 888년 즉위

소종(昭宗, 867~904, 재위 888~904)은 의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희종의 아우로, 당나라를 살리려 노력하였으나 군벌들의 틈바구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황제이다. 묘호 소종(昭宗).

즉위 후 환관 세력과 군벌을 억제하려 시도하였다. 이극용과 주전충 등 군벌의 패권 다툼이 격화되는 가운데 황제는 이를 이용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더욱 무력해졌다.

900년 환관 유계술(劉季述) 등이 황제를 폐위하는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신하들의 도움으로 다시 복위하였다. 이후 주전충에 종속되어 904년 강제로 낙양(洛陽)으로 천도당하였다.

904년 주전충의 부하에게 암살되었다. 황제 살해라는 전례없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으며, 이는 당나라 멸망이 임박하였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의 사후 어린 아들 애제가 즉위하였다.

20대 애제 천우제 (이주) — 904년 즉위

애제(哀帝, 892~908, 재위 904~907)는 소종의 아홉 번째 아들로,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다. 주전충의 꼭두각시로 옹립되어 907년 선위를 강요받아 당나라의 289년 역사가 막을 내렸다. 시호 소선광렬애효황제(昭宣光烈哀孝皇帝).

즉위 당시 13세였으며, 실권은 주전충이 완전히 쥐고 있었다. 주전충은 당나라의 남은 조정 대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황제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907년 주전충의 강압에 의해 선위(禪位) 조서를 내렸으며, 주전충은 후량(後梁)을 건국하였다. 이로써 618년 건국된 당나라는 289년 만에 공식적으로 멸망하였고, 이후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가 개막되었다.

선위 후 제음왕(濟陰王)으로 강등되었다가 908년 주전충의 명으로 독살되었다. 당나라의 비극적인 끝을 상징하는 황제로, 중국 역사에서 마지막 황제들의 비운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후량(後梁) 건국으로 오대십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오대(後梁·後唐·後晉·後漢·後周)와 십국이 난립하는 분열의 시대가 50여 년간 이어지다가, 960년 조광윤(趙匡胤)이 송(宋)나라를 건국하며 다시 통일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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