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4대 사화의 배경과 결말
사화란 조선시대에 학자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게 몰려 참혹한 화를 입은 정치적 또는 이념적 대립에 의한 사건이다. 발생한 해의 천간과 지지에 따라 1498년(연산군 4년)의 무오년에 일어난 무오사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년에 일어난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년)의 기묘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1545년(명종 1년)의 을사년에 일어난 을사사화가 대표적이다. 주로 기존 실권세력인 ‘훈구파’가 신흥세력인 ‘사림파’를 탄압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4대 사화시대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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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사화
무오사화는 연산군 재위 4년인 1498년, 무오년에 공신세력인 훈구파가 연산군과 함께 신흥세력인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이다.
발단은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 서거후, 관례에 따라 연산군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그때 주로 사림에 의해 작성된 성종때 사초의 내용이 훈구파의 비리를 기록한 내용이 많아 이것을 불쾌히 여긴 훈구대신들이 내용변경을 요구하게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초내용중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꼬아 말한 조의제문등 세조에 대한 낮은 평가에대한 내용을 연산군에게 알리게 된다. 연산군은 사초를 직접읽고 흥분하여 사림 숙청을 결심하게 된다.
이 일로 일부 사림들은 능지처참등 참수를 당하게 되고 김종직등 이미죽은자는 무덤을 파헤쳐저 부관참시까지 당하게 된다. 또한 많은 사림들이 유배를 가고 결국 영남 사림파는 몰락하게 되었다.
갑자사화
갑자사화는 연산군 재위 10년인 1504년, 갑자년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로 인하여 일어난 사화이다. 성종때 폐비를 찬성한 훈구 원로세력과 사림세력이 폐비 윤씨의 복위를 둘러싸고 연산군과 갈등을 빚으며 상당수 숙청된 사건이다.
무오사화 이후 신료들은 간언을 줄이고, 연산군의 눈치만 보고있었으나, 연산군이 국정은 뒤로한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어 다시 대신들이 간언을 올리기 시작하였으나, 연산군은 이를 왕을 능멸하는 행위라 받아들이고 이들을 , 유배보내기 시작한다.
폭정은 날로 심해져서 성종시절 폐비 윤씨와 관련된 모든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도록 하고, 한명회등 공신집단인 훈구세력과 무오사화때 화를 면한 김종직의 제자들을 대표하는 사림세력을 가리지 않고 유배 또는 처단토록 하였다. 신료들(230여명)과 가족들을 합하면 수천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무오사화가 세조를 욕보인 것에 대한 명분이 였다면 갑자사화는 명분이 약해보인다. 이점이 바로 중종반정으로 이어지는데 있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묘사화
기묘사화는 중종 재위 14년인 1519년에 훈구파 세력과 기득권세력으로 올라선 초기 사림세력들이 조광조(趙光祖), 김식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보낸 사건이다.
중종초기 반정으로 즉위를 하자 권력은 반정 공신들에게 기울어져있다. 중종은 이를 타계하기위해, 기존 훈구세력의 복권, 신진 사림들의 등용을 하였는데 이때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들이 성리학 사상에 대비되는 관청을 폐지하는등 과감한 개혁을 펼쳤기에, 기존 기득권세력들이 위기를 느껴 이들을 숙청하게 된다.
중종은 기존세력들을 견제하기를 원해서 조광조를 가까이 하였으나 나중에는 탁상공론에 그치는 것을 보고 피로를 느껴 조광조를 멀리 하였다 한다.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명종이 즉위하던 1545년에 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난 윤씨 가문 내부의 투쟁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중종은 제1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에게서 명종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씨이였지만,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과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장경왕후 세력인 윤임과 문정왕후 세력인 윤원형은 같은 종씨이면서 서로 세력을 잡으려고 일찍부터 반목하여 세간으로부터 윤임은 대윤, 윤원형은 소윤이라 불렸다.
처음에는 인종즉위후 장경왕후에게 권력이 기울었으나, 인종이 8개월만에 서거한후 명종이 즉위하면서 급격히 문정왕후에게 권력이 역전되었다. 서로 인사권등 관직을 놓고 갈등을 빚던 중 문정왕후와 명종에게 이간케 하여 윤임세력을 역모죄로 죽이거나 유배를 보낸다.
그밖의 사화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등을 4대 사화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 사화때 학자들 및 신하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 이후로 큰 사화는 없었지만 선조 집권 시 까지 사림세력들의 중앙으로 진출은 크게 위축되었다.
정미사화(1547년)
실질적으로 을사사화의 연속이다. 을사사화 이후 정국이 소윤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익명의 벽서를 발견되어 다시 대윤세력과 그를 따르던 사림학자들이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신임사화(1721~1722년)
조선 20대 경종 원년인 신축년과 임인년에 걸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고 한다. 이 사건은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이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