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조선(朝鮮)왕조는 고려의 장수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신진사대부와 협력하여 세운 왕조국가로 1392년부터 한일 합방이 되는 1910년까지 518년간 한반도에 존재한 왕조 국가를 말한다.
아래 조선왕조의 왕가 계보도는 조선의 왕가를 중심으로 왕위가 1대 태조 이성계로부터 27대 순조까지 어떻게 이어 왔는가에 대한 것이다. 왕 즉위는 못하였으나 왕가의 혈통을 이었다면 힌색 점선박스로 표시하였다. 클릭하면 각 왕들의 상세한 정보와 업적을 볼 수 있다.
조선왕조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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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역대 왕 즉위 순서와 즉위 기간
No. | 묘호 | 이름 | 출생년 | 즉위년 | 즉위나이 | 즉위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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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 태조 | 이성계 | 1335년 | 1392년 | 58세 | 7년 |
2대 | 정종 | 이방과 | 1357년 | 1398년 | 42세 | 2년 |
3대 | 태종 | 이방원 | 1367년 | 1400년 | 34세 | 18년 |
4대 | 세종 | 이도 | 1397년 | 1418년 | 22세 | 32년 |
5대 | 문종 | 이황 | 1414년 | 1450년 | 37세 | 2년 |
6대 | 단종 | 이홍위 | 1441년 | 1452년 | 12세 | 3년 |
7대 | 세조 | 이유 | 1417년 | 1455년 | 39세 | 13년 |
8대 | 예종 | 이광 | 1450년 | 1468년 | 19세 | 1년 |
9대 | 성종 | 이혈 | 1457년 | 1469년 | 13세 | 25년 |
10대 | 연산군 | 이융 | 1476년 | 1494년 | 19세 | 11년 |
11대 | 중종 | 이역 | 1488년 | 1506년 | 19세 | 39년 |
12대 | 인종 | 이호 | 1515년 | 1544년 | 30세 | 8개월 |
13대 | 명종 | 이환 | 1534년 | 1545년 | 12세 | 22년 |
14대 | 선조 | 이연 | 1552년 | 1567년 | 16세 | 41년 |
15대 | 광해군 | 이혼 | 1575년 | 1608년 | 34세 | 15년 |
16대 | 인조 | 이종 | 1595년 | 1623년 | 29세 | 27년 |
17대 | 효종 | 이호 | 1619년 | 1649년 | 31세 | 10년 |
18대 | 현종 | 이원 | 1641년 | 1659년 | 19세 | 15년 |
19대 | 숙종 | 이순 | 1661년 | 1674년 | 14세 | 46년 |
20대 | 경종 | 이윤 | 1688년 | 1720년 | 33세 | 4년 |
21대 | 영조 | 이금 | 1694년 | 1724년 | 31세 | 52년 |
22대 | 정조 | 이산 | 1752년 | 1776년 | 25세 | 24년 |
23대 | 순조 | 이공 | 1790년 | 1800년 | 11세 | 35년 |
24대 | 헌종 | 이환 | 1827년 | 1834년 | 8세 | 15년 |
25대 | 철종 | 이변 | 1831년 | 1849년 | 19세 | 14년 |
26대 | 고종 | 이형 | 1852년 | 1863년 | 12세 | 43년 |
27대 | 순종 | 이척 | 1874년 | 1907년 | 34세 | 3년 |
조선왕조 역대 왕의 업적
태조(太祖, 1335년 ~ 1408년, 재위 : 1392년)는 고려 말 무신정치가이며, 조선을 건국한 초대 왕이다.
고려의 장수이며 공민왕때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다. 이때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한다. 우군도통사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업적중 으뜸은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여 지방의 분권력을 통제하는 것이며, 고려시대의 기득권적인 관료들을 배척하고 새로운 관료진을 임명하여 조선의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군사력을 강화하고 동북아시아와의 관계를 중요시하여 국가의 안보와 국력을 강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국제 정세에 있어서 이성계는 몽골의 위협과 침략에 대비하여 강화된 군사력으로 대응하였다. 또한, 조선은 중국과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의 안정과 국제적인 입지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대마도 정벌을 시도하여 조선의 국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대마도는 당시 일본의 군사적 중요성이 높았던 지역으로, 이성계는 1388년에 대마도 정벌 작전을 계획했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를 통해 조선은 외국과의 군사적 대결을 준비하고 동북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조선의 국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종(定宗, 1357년~ 1419년)은 이성계의 둘째 아들로서, 고려 말기의 무신이자 조선의 제2대 임금이다.
태조 6년 동생 정안군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던 영안군은 왕세자가 되기를 사양하였으나, 태조의 장자 진안대군은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1개월 뒤인 1398년 태조의 양위로 조선 제2대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정종은 일찍이 태종이 창업 대의에 가장 열정적이었던 것을 인정하여 직접적으로 동생 태종이 왕위에 오를 것을 추천하는 등 왕위에 관한 관심은 없었다.
태조 이성계와 정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이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다.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조선 3대왕에 즉위하여 기존 공신들을 축출하고, 사병을 혁파하였으며 호패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했다.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고려 말기에 이방원은 조선을 새롭게 세우려는 사람이였고, 정몽주는 고려를 그대로 두고 개혁하자는 주장이였다. 이방원은 뛰어난 학자이면서 정치가인 정몽주와 함께 새로운 국가를 세워볼 마음으로 ‘하여가’로 마음을 떠 보았고, 정몽주는 ‘단심가’로 자신의 고려에 대한 충정의 마음을 답하게 된다. 결국 정몽주는 죽임을 당하게 되고.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
사병 혁파와 법령 개정, 관제 개정과 신문고 설치, 개국 공신 숙청, 서적 간행등 실질적 조선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세종(世宗, 1397년 ~ 1450년, 재위 : 1418년)은 조선의 제4대 왕이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이며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지만 글을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기용하였다.
국방에서는 이종무로 하여금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징옥, 최윤덕, 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을 실시하여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국경선을 이루었다.
문종(文宗, 1414년 ~ 1452년, 재위 1450년)은 조선의 제5대 왕이다. 묘호는 문종(文宗)이며, 문치를 발전시키고 다스렸다는 뜻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조선의 왕 중에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다.
문종은 6품 이상까지 윤대를 허락하는 등 하급 관리들의 말도 빠짐없이 경청하는 등 열린 정책을 펴는 한편,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하였다. 문종은 역사와 병법을 정리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세조(世祖, 1417년 ~ 1468년)는 조선의 제7대 왕이다.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인 문종 사후에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조선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이기도 하다.
단종(端宗, 1441년 ~ 1457년, 재위 1452년)은 조선의 제6대 왕이다.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계유정난)으로 양위하였다가,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운명을 다하였다
예종(睿宗, 1450년 ~ 1469년, 재위 1468년 ~ 1469년)은 조선의 제8대 왕이다.
성종(成宗, 1457년 ~ 1495년, 재위 : 1469년 ~ 1494년)은 조선의 제9대 왕이다.
성종은 사림파를 중용하고 원상제를 폐지하며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억불승유 정책을 추진했고, 왕에게 유학의 경서와 사서를 진강하는 경연을 되살렸다. 1485년에는 초선시대 최고의 법전이자 세조때 시작한 경국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하여 조선 유교정치의 틀을 닦는 업적을 세웠다.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연산군(燕山君, 1476년 ~ 1506년, 재위 : 1495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왕이다. 성종의 장자로,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군국기무를 관장하는 비융사를 설치토록 하여 병기를 만들게 하고 변경지방으로 주민이주를 장려하였다. 지금의 충청도의 녹도에 침공한 왜구를 격퇴하고 건주야인을 토벌하였다
국가가 생필품을 대여하는 사창, 물가를 관리하는 상평창·진제창등을 설치하여 빈민의 어려움을 덜어주려 노력하였다.
중종(中宗, 1488년 ~ 1544년, 재위: 1506년 ~ 1544년)은 조선의 제11대 왕이다.
인종(仁宗, 1515년 ~ 1545년, 재위 : 1544년 ~ 1545년)은 조선의 제12대 왕이다.
명종(明宗, 1534년 ~ 1567년, 재위 : 1545년 ~ 1567년)은 조선의 제13대 왕이다.
선조(宣祖, 1552년 ~ 1608년, 재위 : 1567년 ~ 1608년)는 조선의 제14대 국왕이다.
선조는 주자학의 보급을 장려했고, 사림을 중용했으며, 스스로 학문에 힘써 강연에서 이황·이이 등 대유학자들과 경사를 토론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를 비롯한 여러 사림인사들을 신원을 복구하였다.
붕당정치가 성립하였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되고, 실권을 잡은 동인은 또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분열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난 상황에서도 내부 결속을 이루지 못했다.
1592년에 일본 왜구의 침략으로 발발한 임진왜란이 7년간 이어지며 국토가 황폐화되고 전국이 전쟁터가 되어 개국 이래 200년만에 내외적으로 가장 혼란한 상황을 맞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고, 선조는 바로 의주까지 퇴각 하게 된다. 퇴각하던 도중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한 광해군으로 하여금 분조를 설치하게 하여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명나라는 그해 12월 4만 5천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퇴각하는 동안 이순신·권율 등이 이끄는 관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군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어 일본군을 격퇴했다.
광해군(光海君, 1575년 ~ 1641년, 재위: 1608년 ~ 1623년)은 조선의 제15대 왕이다. 임진왜란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의병을 이끌고 항전 하였다. 즉위 후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 노선을 취하였으며 전후 복구와 대동법의 실시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지만, 잦은 옥사와 중립외교,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유폐한 일로 인해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인조(仁祖, 1595년 ~ 1649년, 재위: 1623년 ~ 1649년)는 조선의 제16대 왕이다.
인조반정(서인과 남인의 협력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등으로 국토는 황폐화 된다. 병자호란때에는 인조가 직접 눈밖에 쌓인 비탈길을 내려와 수향단에 좌정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세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다.
효종(孝宗, 1619년 ~ 1659년, 재위: 1649년 ~ 1659년)은 조선의 제17대 왕이다.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하였다. 소현세자의 급사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었다.
현종(顯宗, 1641년 ~ 1674년, 재위: 1659년 ~ 1674년)은 조선의 제18대 왕이다.
현종은 재위기간중 북벌론을 일단 중단시키고 양란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의 지배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재정구조의 재건을 위해서는 호구수의 증가와 농업의 발전, 조세징수체계의 확립에 노력했다. 농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각지에 관개시설을 만들어 수리면적을 늘렸고, 이듬해에는 양관을 각 도에 보내 관개시설을 점검하게 했다. 아울러 조세체계의 정비를 위해 1660년 호남의 산군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1663년에는 호남대동청을 설치했으며, 1662년 경기도에 균전사를 임명하여 양전을 실시했다.
1차 예송(기해예송)은 효종이 승하 후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제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은 계모가 아들의 상중에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며 충돌하였다. 남인의 3년상과, 서인의 1년상이 대립하였는데,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가 장자를 대상으로 하는 3년상의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서인의 1년상이 채택되었다. 서인의 안이 채택되었지만 이때 현종은 서인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2차 예송(갑인예송)은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대비가 며느리의 상중에 상복을 얼마 동안 입을 것인가를 두고 다시 서인과 현종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서인은 기년복(1년 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9개월 복)으로 수정하였는데, 남인이 대공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기년복(1년복)을 주장하였다. 이때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논파하며 남인의 기년복을 채택하여 서인 정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숙종(肅宗, 1661년 ~ 1720년, 재위: 1674년 ~ 1720년)은 조선의 제19대 왕이다.
숙종은 왕권을 강화와 기득권 세력의 견제를 위해 집권 당파를 공격하거나, 한 당파를 이용해 다른 당파를 공격해서 정권을 바꾸는 등의 극단적인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런 행위를 환국이라고 부른다. 1, 2차 예송을 거치면서 당쟁의 골이 깊어진 와중에 환국을 3차례의 환국을 시행하여 많은 사림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숙종은 처음에 외척인 김석주를 끌어들여 송시열의 서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남인 정권을 성립시켰다. 남인은 정권을 잡게 되자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가진 청남과 서인들에 대한 입장이 비교적 온건한 탁남으로 분열하여 결국 탁남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경신환국때에는 숙종이 지나치게 강해진 남인 세력을 견제하고자 다시 김석주를 시켜 가짜 역모사건을 만들어 많은 남인들을 죽이거나 귀향보내며 서인 정권을 세웠다. 이처럼 지나친 처사는 서인 세력 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를 통해 노론과 소론이 분립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기사환국은 주도권을 잡은 송시열 등의 서인 정권이 희빈 장씨가 낳은 아이의 원자 책봉 문제로 숙종에 반발하다가 다시 축출되고 다시 남인이 정권애 복귀하는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하고 송시열을 사사하였다.
다시 5년 뒤 숙종은 갑술환국을 단행하여 서인 정권을 회복시켰다. 3번의 환국 이후로 숙종은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국을 이끌어 갔지만 숙종 말년에는 노론으로 세력이 기울었다.
경종(景宗, 1688년 ~ 1724년, 재위: 1720년 ~ 1724년)은 조선의 제20대 왕이다. 숙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장씨이다.
영조(英祖, 1694년 ~ 1776년, 재위 : 1724년 ~ 1776년)는 조선의 제21대 왕이다.
탕평책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노론과 소론의 당론을 중재하고 실질적 왕권을 도모 하였지만 결국 실패 하였다. 둘째 아들 사도세자와 갈등을 빗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일하게 영조의 아들대에는 재위한 임금 없이 손자 정조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가혹한 형벌을 폐지 하여 민중들이 인권을 존중받도록 하였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여 민중들이 일을 직접 듣고자 했다. 금주령을 내려 사치와 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고 균역법을 실시하는등 민생의 안정에 주력을 두었다.
정조(正祖, 1752년 ~ 1800년, 재위: 1776년 ~ 1800년)는 조선 제22대 왕이다
탕평책과 왕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로 왕권 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고, ‘홍재전서’를 출간하고 각종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등을 장려하였다. 조선의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는 수원 화성을 축성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 영조와 함께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루어 낸 대표적인 군주로 평가된다.
순조(純祖, 1790년 ~1834년, 재위: 1800년 ~ 1834년 )는 조선의 제23대 왕이다
순조에 이르러 탕평정책이 실패하고 붕당정치가 약화되어, 권력이 특정 외척 가문에 집중되어 국정이 운영되는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때 부터 헌종과 철종에 이르기 까지 3대 60여년간 왕의 외척일가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었다.
헌종(憲宗, 1827년 ~ 1849년, 재위 : 1834년 ~ 1849년)은 조선의 제24대 왕이다.
철종(哲宗, 1831년 ~ 1864년, 재위: 1849년 ~ 1864년)은 조선의 제25대 왕이다.
고종(高宗, 1852년 ~ 1919년, 재위:1864년 ~ 1897년, 재위: 1897년 ~ 1907년)은 조선의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다.
초기에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받았다. 1875년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을 하고 내정개혁 및 개화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하자 대한제국을 수립하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등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외적으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실질적으로 일본의 영향력 하게 들어가게 된다.
순종(純宗, 1874년 ~ 1926년, 재위 : 1907년 ~ 1910년)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